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문단 편집) === 전후 === [[파일:external/i57.fastpic.ru/91cf0051fe59e714545ee6dfe5b8c24c.jpg|width=450]] ▲ 종전 후 [[드레스덴]]에 거주할 때 찍은 사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 파울루스에게 최악의 혐의와 무고가 난무했으며 그에게 변호할 기회가 주어지기 전까지 그 어떤 혐의도 믿지 않겠다." >- 하인츠 구데리안 《한 군인의 회상》 파울루스는 제6군 사령관 취임 직후, 이전에 라이헤나우가 발령했던 "동부전선에서는 장병들이 통상 전쟁 방식이 아니라 유대인·볼셰비즘을 절멸하는 전사로서 싸워야 한다."라는 '''1941년 10월 10일 자 [[강조 명령]](Severity Order)을 폐기했다.'''[* 앤터니 비버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무장친위대]]가 잔혹한 행위를 했었지만, 파울루스는 분명히 해당 명령을 폐기했고 이런 명령 거부까지 파울루스를 기소할 순 없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헤르만 호트]]와 달리 이런 강조 명령을 두둔하지 않았기에 범죄 혐의로 기소될 일이 없었고 소련군에 협력이 인정돼 침략 범죄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다. 억류 생활 역시 포로 수용소가 아닌 [[모스크바]]에 있는 안전 가옥에서 지낼 수 있었다. 독일군 포로 대부분은 10년 이상 소련 영토에서 전후 복구 작업에 투입됐다가 1955년에까지 순차적으로 석방됐지만, 파울루스는 1953년 소련에 억류됐던 다른 추축군 포로들보다 2년 먼저 포로 생활에서 석방된 후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드레스덴]]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 시기에 [[군무원]] 신분인 동독군사역사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는 파울루스 사후에야 이런 포로가 귀환할 수 있었다고 적혀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장성급 포로라고 대우가 마냥 좋은 건 아니어서 디트리히 폰 자우켄 기갑대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고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는 사망하기 전 7개월 간만 한 달에 한 번 가족에게 엽서를 쓰는 게 허락됐다. 그는 사후 매장 장소조차 기록이 없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고급 장교들은 육체 노동에 동원되던 사병들과는 달리 상당히 후대받았다. 소련도 전후를 의식해 자신에게 협조하는 독일 고위 장성들을 포섭하려고 노력했고 전후 재건된 [[동독]]군 지휘관들은 초기 상당수(근 90%)가 이렇게 소련군에 포섭된 독일 국방군 출신이었다.] 이러한 파울루스의 운명이 여타의 독일군 원수들, 즉 종전을 맞이하지 못한 채 사망한 [[페도어 폰 보크]]와 [[발터 모델]],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돼 처형되거나 자살한 [[에르빈 폰 비츨레벤]], [[귄터 폰 클루게]], [[에르빈 롬멜]], 전범으로 수 년 간 감옥살이를 한 [[알베르트 케셀링]], [[페르디난트 쇠르너]], 결국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옥사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보다는 운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운의 문제가 아니다. 1949년 소련 내부에서 개시된 전범 재판에서도 소련이 재차 파울루스를 기소할 수 없었을 만큼 그가 범죄에 반대하고 해당 명령을 폐기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는 별도로, 서베를린 포위 직후인 1949년 소련 정부의 재산을 파괴했다는 혐의 등으로 [[알프레트 잘베히터]] 해군 상급대장, [[에리히 하르트만]] 공군 소령, 카를 슈트레커 등이 기소되었다. 소련군에 전적으로 협조했던 폰 자이들리츠조차도 여기서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1997년 러시아 정부는 이들에 대한 기소가 위헌이었음을 인정했다.] 게다가 구데리안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 파울루스에게 최악의 혐의와 무고가 난무했으며 그에게 변호할 기회가 주어지기 전까지 그 어떤 혐의도 믿지 않겠다"'''고 기록할 만큼 종전 이후의 파울루스의 삶은 오욕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후 공산 체제인 동독에서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긴 했지만 지병이 악화되면서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고, 자신이 직면했던 상황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바라본 기록을 저술했으나 생전에 발표조차 하지 못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83px-Bundesarchiv_Bild_183-25343-0001%2C_Berlin%2C_Pressekonferenz%2C_Friedrich_Paulus.jpg|width=100%]] || ||▲ 1954년 7월 2일에 동베를린 언론회관에서 열린 독일 통일을 목적한 위원회 주최 기자회견에 참석한 파울루스 || 1956년 후반 무렵 지병이었던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이 악화하면서 급격히 쇠약해졌고 자택에서 투병하던 도중에 사망했다. 죽는 순간까지 히틀러의 후퇴 금지 명령에 복종해 많은 부하를 죽게 했다는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시신은 [[드레스덴]]의 톨케비츠 공동묘지에 안장됐지만 파울루스의 유언에 따라 [[서독]] [[바덴바덴]] 중앙묘지의 파울루스 가족 묘역으로 이장돼 아내 곁에 묻혔다. 파울루스의 아내 콘스탄체는 남편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후 파울루스라는 성을 포기하고 이혼하라는 [[게슈타포]]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파울루스가 소련 측 선전 방송에 등장하자 '친족의 연대 책임에 관한 포고령'에 따라 아들과 구속됐지만 이탈리아 영토에 진입한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그러나 종전 후 남편이 포로 생활에서 석방되기 전인 1949년에 사망했고 전후 파울루스는 석방은 됐으나 동독에 억류되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아내의 무덤을 찾아갈 수 없었다. 1961년, 파울루스가 생전에 남긴 기록과 6군 관련 문서를 기반으로 전사학자인 발터 괴를리츠와 파울루스의 아들인 에른스트 알렉산더가 공동 편집한 《Paulus und Stalingrad》가 서독에서 발매되고 [[미국]]에도 번역 출간되었지만, [[냉전]]이 격화된 시대 분위기를 고려하면 서독에서도 미국에서도 '소련군에 항복하고 협조한 군 사령관'이 남긴 기록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1949년부터 순차적으로 석방되어 1955년에 마지막으로 석방된 독일군 포로들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생존자들이 파울루스를 원망했던 것도 그러한 분위기에 일조했다. 포로들 중에서도 고위 장교들은 파울루스가 처한 상황을 이해했는데 계급이 낮은 장병들일수록 파울루스를 원망했다고 한다. 10년이 넘는 포로 생활 끝에 9만 1천여 명 중 5천여 명밖에 살아남지 않았으니 생존자들이 최고 책임자를 원망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같이 항복했던 몇몇 장성과 달리 1년 반이 넘는 시간 소련군 측에 협조를 거부했다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고서야 히틀러 정권의 전복을 호소하면서 소련군에 협조하였다는 사실, 장남의 전사 사실을 전해 듣게 되면서 독일군의 전황에 더욱 회의적으로 변했다는 사실, 이미 진 전쟁을 되도록 빨리 끝내고 헛된 죽음의 숫자를 줄이고 싶어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잊혔다. 정작 독일의 다른 장성들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 직후 총통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비난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중잣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울루스의 기록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냉전의 종식과 독일의 통일 이후 손자인 알렉산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박사에 이르러서였다. 파울루스의 쌍둥이 아들 모두 육군에 입대했는데, 장남인 프리드리히는 안치오에서 전사했고 차남인 에른스트 알렉산더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부상당해 이송된 후 하르코프 전투에서도 부상당했다. 전술한 대로 게슈타포에게 감금당했지만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형제 모두 최종 계급은 대위. 그러나 에른스트 알렉산더는 52세가 되던 해인 1970년에 자살했는데 이것은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하던 때와 같은 나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